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8-16 08:24:22
기사수정
광복절 순국선열분들을 중 알려지지 않은 분들을 알리고자 등록한 기사입니다.


▲ 기념관 건립을 위한 작품전이 진행 중 입니다.


더봄뉴스】 보재 이상설 선생(1870~1917)은 민족 독립 운동가이자 우리나라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로 최초의 민족학교인 서전서숙 설립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정사최초의 항일무장투쟁운동기지인 한흥동 건설권업회 조직독립군사학교 대전학교를 세웠으며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선임되어 구국의 독립운동을 펼치다 1917년 3월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최근 발견된 일본의 비밀문서에서 일제는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스승이자 배후로 보재 이상설 선생을 지목하고있다.)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은 민족 독립을 위한 처절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상설 선생을 기억하고 근대 수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선생의 학문과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맞닿아 있는 선생의 철학을 전파하기 위한 제대로 된 시설이 없고 선생과 함께 연해주를 중심지역으로 항일운동을 펼친 한흥동과 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에 참여한 많은 우국지사와 함께 싸워온 우리 민족과 동포를 기억하기 위한 시설이 없어 기념사업회와 충청북도진천군이 중심이 되어 2013년 이상설 선생 숭모사업과 함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기념관 건립은 이상설 선생의 생가와 사당(숭렬사충청북도 기념물77)이 위치한 충북 진천군 생가 인근에 건립하기 위해 부지 마련과 기념관 설계를 완료하고 순국100주기(2017)에 맞추어 공사를 진행기념관을 개관하고자 하였으나 건립에 필요한 기금 중 일부를 기념사업회가 부담을 해야 한다는 문제에 가로막혀 착공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서전서숙’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을 위한 기금모금 작품전은 정부 수립 제99주년과 광복 73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고 정부와 지자체의 노력에도 불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부담 확보의 문제를 일부나마 해결하고자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 </span>보재 이상설 선생 약력 溥齋 李相卨 >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1917) 민족 독립운동가이며우리나라 근대수학의 아버지로 1904년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부당성과 침략성을 들어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 대한협동회을 조직전국적인 항일운동을 전개.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으며,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정사로 파견되어 일제의 대한 침탈과 식민정책에 대한 부당성을 고발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세계 각국의 지지호소를 위하여 노력···러시아 등을 돌며 구국 외교활동 진행.

 

1909년 연해주 봉밀산에 최초의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 韓興洞을 건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최초의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

 

한일합병 후 일제에 의해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1911년 블라디보스도크에서 권업회 勸業會를 조직하여 한민학교를 확장, 1913년 중국 나자구 羅子溝에 독립군사학교인 대전학교 大甸學校를 세우며 실제적인 독립운동, 1914년 이동휘·이동녕 선생등과 최초의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습니다.

 

1915년 상해에서 박은식신규식 선생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본부장을 맡았으나 1917. 3. 2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향년 48세로 서거유언에 따라 우스리스크 수분하 강가에 화장되고동지들을 위하여 문고(文藁)도 모두 소각.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lusbom.dadamedia.net/news/view.php?idx=253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